본문 바로가기

세계 전쟁사

백년전쟁: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계승 전쟁

1. 전쟁의 배경과 원인: 왕위 계승 문제와 봉건적 갈등

14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모계 혈통을 근거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게 된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는 샤를 4세의 여동생이었고, 그는 이를 통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은 살리카 법(Salic Law)을 근거로 여성 계통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 간의 외교적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결국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하면서 장장 116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왕위 계승 문제를 넘어 봉건적 영토 지배권, 무역 통제, 국왕 권력의 정당성을 둘러싼 광범위한 충돌로 확장되었다.

 

2. 초기 전쟁 양상과 잉글랜드의 우세

전쟁 초기, 잉글랜드는 기동력과 화력에 있어 프랑스를 압도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346년의 크레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장궁(Longbow)을 대량으로 운용하여 프랑스 기사들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였다. 프랑스군은 여전히 중세 전통의 중무장 기병 중심 전술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빠른 발사 속도와 긴 사거리의 장궁 앞에서 전술적으로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1356년 포아티에 전투에서는 에드워드 흑태자(Edward the Black Prince)가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생포하며 잉글랜드의 우위를 확고히 다졌다. 이는 프랑스 내부에 큰 혼란을 야기하였고,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는 광범위한 영토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일시적이었으며, 프랑스는 이후 수차례의 반격을 통해 점차 국력을 회복하게 된다.

 

백년전쟁: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계승 전쟁

 

3. 전황의 역전과 잔다르크의 등장

15세기 초, 프랑스는 다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트루아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지정되면서 프랑스는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오를레앙의 농민 소녀 잔다르크였다. 그녀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프랑스군의 사기를 고양시켰고, 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승리를 통해 샤를 7세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프랑스 내부의 통합이 가속화되었다. 잔다르크의 등장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의식을 강화시키는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봉건 질서 속에서 민족주의적 사고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잉글랜드는 점차 전세를 잃으며, 프랑스가 전면적인 반격을 주도하게 된다.

 

4. 전쟁의 종결과 그 역사적 의미

백년전쟁은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최종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는 주요 거점이었던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대륙 내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영토를 잃게 된다. 전쟁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남겼지만, 동시에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정치적 전환점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중앙 집권화가 강화되었고, 왕의 권한은 봉건 귀족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잉글랜드 또한 오랜 전쟁으로 인해 왕실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이후 장미전쟁이라는 내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된다. 백년전쟁은 단순한 양국 간의 전쟁이 아닌, 중세 유럽 질서의 해체와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전조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전쟁 중에 나타난 화포, 장궁, 조직화된 보병 전술은 이후 근대 전쟁 방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