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쟁사 (25) 썸네일형 리스트형 이라크 전쟁: 석유, 권력, 정보전의 교차로 1. 전쟁의 기원과 명분: 석유와 대량살상무기 의혹2003년 발발한 이라크 전쟁은 미국 주도의 군사 개입으로, 그 배경에는 복잡한 지정학적·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제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중동 지역에서 반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세계 안보 강화와 직결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이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됐다. 특히 유엔 무기 사찰단은 이라크에서 WMD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했고, 일부 국가들은 미국의 개입 목적이 ‘안보’가 아니라 중동의 석유 자원 장악과 패권 유지에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라크는 세계 2위 .. 노르망디 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1. 작전의 기원과 준비: 연합군의 결의와 기만전술노르망디 상륙작전(Operation Overlord)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전선의 판도를 바꾼 대규모 작전이었다. 1944년 당시 연합군은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이 독일을 압박하고 있었으나, 서부 전선에는 여전히 독일군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전쟁의 종결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 영국, 캐나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진격할 서부 전선을 개척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대서양 방벽’은 견고했고, 직접적인 상륙은 막대한 희생을 수반할 위험이 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연합군은 ‘포티튜드 작전’을 통해 독일군을 프랑스 파드칼레(Pas-de-Calais) 지역으로 유인하는 기만전술을 구사했다. 가짜 부대, 위장된..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 전쟁의 서막 1. 전운의 고조: 미·일 갈등과 전쟁 불가피론1940년대 초, 일본 제국과 미국 간의 갈등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일본은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 대륙 침략을 확대하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분 아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태평양 이익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특히 1941년 7월,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출은 미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미국은 일본 자본과 자산을 동결하고, 가장 중요한 군수·산업 자원인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자원 의존도가 높은 일본 입장에서는 이러한 경제 봉쇄가 국가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조치였다. 외교 협상은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양측 모두 양보할 의사가 없었다. 결국 일본군 지도부는 미국 태평양 함대의 주력을 선.. 걸프전과 현대 공습전술의 진화 1. 전쟁의 배경과 개전 원인: 이라크 침공과 다국적군의 대응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자국의 경제적 위기와 지역 패권 장악이라는 야망을 이유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자국의 19번째 주로 병합한다고 선언했고, 이에 따라 국제 사회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쿠웨이트의 석유 자원과 페르시아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연합군은 곧 결집되었다. 유엔은 이라크에 철수를 요구하는 다수의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며 '사막의 방패(Operation Desert Shield)'를 개시했다. 걸프전의 시작은 단순한 지역분쟁이 아닌, 냉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다자주의, 국제법, 에너지.. 중동 전쟁사: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끝없는 갈등 1.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 민족주의와 영토 분쟁의 서막20세기 초부터 유럽에서 확산된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의 역사적 고향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에 대한 국제적 동정 여론과 홀로코스트의 충격은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지지를 확산시켰고,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과 아랍인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하지만, 곧바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등 아랍 연합군의 침공을 받으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은 초기 아랍 국가들의 우세로 보였지만, 유대인 무장조직 하가나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은 효율적인 병참과 조직적 전투를 통해 영토를 방어하고 오히려 확장.. 베트남전쟁과 게릴라 전술: 비대칭 전쟁의 교과서 1. 식민지의 유산과 전쟁의 기원: 냉전 속 이념 대립의 뿌리베트남전쟁의 기원은 단순한 내전이 아닌, 식민주의의 잔재와 냉전 이념 대립의 산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재식민화하려 했지만,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은 이에 저항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함으로써 전쟁은 끝났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북베트남은 공산주의 체제 아래 호찌민이 통치했고, 남베트남은 미국의 후원 속에 반공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분단 구조는 한반도와 유사하게 냉전 양강의 이념 경쟁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결국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남베트남 내에는 공산주의.. 한국전쟁: 냉전 시대 첫 열전, 남북 분단의 기원 1. 분단의 씨앗: 해방과 38선의 탄생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조선은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선은 곧바로 미국과 소련의 군정 하에 분할 점령되었다. 미국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측을, 소련은 북측을 각각 점령하며 한반도는 냉전의 격전지로 떠올랐다. 38선은 군사적 편의를 위해 설정된 임시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 영구적 경계선이 되었고, 이는 남북한의 정치 체제를 완전히 다르게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미소공동위원회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논의였지만, 이념적 간극과 상호 불신으로 결렬되었고, 결국 남북한은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에 들어섰고, 곧이어.. 히틀러의 전격전 전략: 번개처럼 유럽을 삼키다 1. 전격전(Blitzkrieg)의 개념과 기원‘전격전(Blitzkrieg)’은 독일어로 ‘번개 전쟁’을 뜻하며, 20세기 초반 군사 전략의 개념을 뒤흔든 파괴적이고 혁신적인 작전 방식이었다. 전격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의 교착 상태와 지지부진한 전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며, 빠르고 집중된 공격으로 적의 방어선을 무력화하고 깊숙한 침투를 통해 빠르게 항복을 유도하는 전략이었다. 히틀러와 독일군 참모들은 이 전술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켰고, 이를 위해 보병, 기갑, 항공 부대의 통합적 운용이 핵심 요소로 채택되었다. 특히 기갑사단(Panzerdivision)의 역할은 전격전에서 중심이 되었으며,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는 전장 전방의 적 거점을 정밀 타격하여 혼란을 유도.. 이전 1 2 3 4 다음